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던 미술론- 숭고의 미학, 차이의 존재론 그리고 비판(..

원 제목: 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던 미술론- 숭고의 미학, 차이의 존재론 그리고 비판(배철영)
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던 미술론
- 숭고의 미학, 차이의 존재론 그리고 비판* -
배 철 영(동의대)

[한글 요약]
이 논문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1)숭고란 현시할 수 없는 것, 곧 이념을 현시하고자 함으로써 비롯하는 미적 감정이다. (2)모던 미술과 함께 포스트모던 미술은 현시할 수 없는 것을 현시/암시하고자 함으로써 숭고의 미학을 공유한다. (3)포스트모던 미술은 모던 미술에서 역사적으로 보여지는 기법상의 전위/아방가르드 실험을 철학적으로 전치시켜 자신의 방법상의 원리로 삼는다. (4)현시할 수 없는 거대 이념들의 표현은 모던 미술 내지는 모던 작가들의 주체적 의지가 포기하지 못하고 연연해하는 과제인 반면에, 포스트모던 미술은 그러한 모던적 과제를 거부한다. 그것은 오히려 세계의 불확실성과 차이의 존재론을 드러내는 데 기여하고자 한다. (5)포스트모던 예술/미술가는 모든 전언들을 전유할 수 있는 배타적 권리를 가진 모던의 전능한 존재가 아니다. 그의 과제는 존재 세계로부터 전해져 오는 미지의 메시지들을 수집하고 획득하며 복귀시키는데 자신의 온 신경 조직을 가동시키는 탈인간중심주의적 존재이다. (6)그러나 이러한 존재 세계의 일어남들, 사건들로서의 예술 작품 모두가 그대로 숭고한 것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곧 쓰레기일 수 있음이 지적되어야 한다. (7)그렇다면 자본 증식을 목표로 하는 현대 상업주의 사회에서 예술이란 이름으로 무수히 증가하고 범람하는 작품들에서 어떻게 세계의 숭고한 모습을 현시하는 것과 단순 사건을 구별할 수 있는가? 혹은 어떻게 진정한 숭고를 알릴 수 있는가? (8)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일상에서 우리가 잊고 있거나 잃어버렸던 가치들, 가령 동아시아적 정신성-자연을 포함한 존재 세계와 삶을 향한 비서구적 태도-를 새롭게 복귀시키는 것도 한 전략일 수 있을 것이다.

주제분야 : 미학, 예술철학
주 제 어 : 리오타르, 숭고의 미학, 모더니즘, 아방가르드, 포스트모더니즘

1. 머리말
이 글은 프랑스 철학자 리오타르(J.-F. Lyotard)의 포스트모던 미술론을 비판적으로 개관하면서 오늘의 미술이 처한 상황을 환기시키고, 나아가 그것이 나아갔으면 하는 새로운 한 방향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나중에 살피겠지만 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던 미술론은, 다소 모호하여 단순화 시켜 말하기는 어렵지만 무엇보다도 모던 미술 혹은 모더니즘 미술과의 연속과 단절로 정식화될 수 있다. 나는 이 정식화의 풀이 과정을 개략적으로 그려 보임으로써 앞서 말한 과제를 수행할 수 있길 바란다.
그래서 논의는 리오타르 미술론의 얼개를 잡아가는데서 시작되고 또한 이는 글 내용의 상당 부분을 차지할 것이다. 얼개는 개략 숭고 개념, 모던 미술의 미학으로서 '숭고의 미학', (포스트)모던 미술을 규정하는 특징으로서 '전위/아방가르드' 개념, 모던 미술과 포스트모던 미술의 차이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나는 이미 말했듯 리오타르의 입장, 그러니까 그의 포스트모던 미술의 이념에 대한 단순한 지지자는 아니다. 다원성과 새로움을 향한 끊임없는 옹호와 인간중심주의 미학에 대한 극복을 도모하는 그의 노력에 십분 공감하면서도 여전히 남아 있는 문제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며 오늘의 미술이 다시 출발할 수 있을 지점을 조심스럽게나마 타진할 수 있었으면 한다.

2. 모던/모더니즘 미술의 미학, 혹은 숭고의 미학
1) 숭고-모순적인 미적 감정
일상에서 우리는 숭고라는 말을 어떤 경우에 사용하는가? 철학 혹은 미학에서 숭고를 다루는 사람은 버크(E. Burke)와 칸트(I. Kant)이다. 물론 이들 이전과 이후에도 숭고를 주제화 한 다른 철학자들이 있지만 이 글에서는 특히 칸트의 견해에 대한 리오타르의 해석을 중심으로 주로 논의할 것이다.
우선 칸트에 있어 숭고의 체험은 어떤 종류의 무한하고 절대적인 크기에 대한 미적 판단 혹은 미적 평가로서 발생한다. 혹시 이런 체험을 해본 적은 없는가? 태풍 경보가 발효되어 폭풍우가 심하게 휘몰아치는 어두운 밤, 가령 청사포 방파제나 태종대 해안 절벽 위에서 밀려오는 거대한 파도로 울부짓는 듯한 바다를 형용하기 어려운 기분에 싸여 바라본 경험 말이다. 아마 이 기분은 그 거대한 자연 앞에서 공포 속에 휩싸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장관에 대한 질식할 듯한 감동을 느끼는 순간 엄습하였을 것이다. 이 느낌이 숭고(the sublime, das Erha- bene) 내지는 숭고의 감정이고, 이것은 일종의 미적 경험이다.
그런데 똑같은 미적 경험이라 하더라도 산행 중에 숲길에서 한 송이 들꽃을 볼 때 느끼는 느낌과는 사뭇 다르다. 우리가 들꽃을 볼 때 느끼는 것은 조화로운 아름다움이다. 칸트에 따르면 이 아름다움은 원칙적으로 들꽃이라는 대상의 제한되고 질서 있으며 조화로운 형상에서 비롯한다. 여기서 대상의 형상이 '제한된다'는 말은 형상이 안정된 형태로 표상/현시(presentation) 되어 우리의 감각 작용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에 반해 숭고는 대상의 제한되지 않고 무질서한 혼란에서 유발된다. 칸트는 심지어 그 혼란과 무질서가 클수록 숭고의 이념은 더욱 많이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숭고의 체험은 나중에 다시 말하겠지만 대상의 무한성·절대성·무제한성에 관계하는 바 모든 제한된 형상의 테두리를 종국적으로 뛰어넘는 곳에서 우리의 '이성'의 활동에 의해 발생하기 때문이다.
설악산이나 지리산 자락에서 홀로 밤을 새게 되면 다 한 번쯤 경험하였을 것이라 생각되지만 혹 칠흑같은 밤, 정적에 싸여 무심결에 고개를 들고 밤하늘을 올려다 본 적은 없는지? 공해로 찌든 도시에 사는 우리들로서는 하늘에 그토록 많은 별들이 있을 줄이야 미처 깨닫지 못하고 엉겁결에 놀라움과 탄성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끝간데 없는 밤하늘에 촘촘히 빛나고 있는 저 무수한 별들이 누군가의 표현처럼 금방이라도 내 머리위로 쏟아질 것 같은 위압감 속에서 파스칼(B. Pascal)의 그 유명한 구절은 자연히 떠오르지 않을 수 없고, 그 말이 뜻하는 바를 이해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 무한한 공간의 영원한 침묵이 나를 두렵게 한다'. 그러한 형용키 어려운 감동 속에서 어느 누가 신적이고 절대적이며 무한한 것을 예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대상의 이러한 무한성·절대성·무제한성이란 어떤 것인가? 우리는 절대적으로 큰 것, 무한히 강력한 힘을 생각할 수는 있지만 이런 절대적 크기와 무한한 힘을, 마치 이 책상이나 저 문처럼 '눈에 보이도록' 어떤 대상으로 현시할 수 있을까? 요컨대 신적인 것, 절대성, 무한성을 볼 수 있거나 현시할 수 있을까? 고통스럽게도 우리에게는 이런 능력이 주어져 있지는 않다. 이런 것들은 이른바 우리들이 '현시할 수 없는 것들', 곧 '이념들'이다. 우리는 이러한 이념들의 존재를 이성적으로 사고하고 생각할 수는 있으나 형상화한다거나 표현할 수는 없다. 금방 '고통스럽게도'라는 표현을 쓴 것은 우리가 이들 '현시할 수 없는 것(the unpresentable)' 혹은 '이념'을 현시할 수 없는데도, 곧 눈에 보이도록 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내재되어 있지 않음에도 우리는 이를 비록 불완전하게나마 현시하고 표현하고자 애쓴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서 이다. 요컨대 숭고란 현시할 수 없는 것, 곧 이념을 현시하고자 하거나 눈에 보이도록 할 때 생겨나는 미적 감정이란 뜻이다.
모든 미적 체험에는 즐거움(쾌)이 따른다고 할 수 있다. 숭고의 체험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숭고의 체험에 동반되는 쾌는 조화로운 아름다움이 제공하는 쾌와는 성격이 다르다. 앞에서 나는 한송이 들꽃에서 느끼는 아름다움과 벼랑가에서 울부짓는 바다를 바라보면서 느끼는 미적 체험을 구분한 바 있다. 언젠가 나는 산행길에서 도라지꽃을 우연히 발견하고서는 그 애처로운 모습과 보라빛이 너무 예뻐 길가에 쭈구리고 앉아 한참을 바라보며 즐거워하다 나중에 일어서야 해서 아쉬워하며 발걸음을 옮긴 적이 있다. 이때 나의 느낌은 일종의 편안하고 조화로운 쾌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러나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밤 산더미같은 파도가 해안으로 밀려드는 것을 숨죽이며 목격하게 될 때 우리는 그 압도적인 크기나 무한한 힘 앞에서 잔뜩 위축되어 우선 공포와 전율을 느끼게 된다. 이것은 확실히 즐거움이 아니라 불쾌감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을 누구나 비슷하게 겪어 보았을 것이라 추측되지만 혹시 그런 공포 속에서도 긴장과 함께 그 광경이 주는 묘한 감동을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즐겨본 적은 없는지? 먼저 몸을 피해야 한다는 생각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 못박힌 듯 서서 잔뜩 웅크리고 그 어마어마한 파노라마가 주는 느낌에 휩싸여 본적이 없는가 하는 것이다. 이런 느낌이 곧 '희열(delight)'이다. 희열은 이처럼 그토록 긴장되어 있던 마음이 갑자기 이완되어 어떤 반전의 순간 찾아드는 쾌이다. 그래서 희열은 하나의 쾌이되 반드시 불쾌를 매개로 해서만 발생하는 쾌라 할 수 있다. 숭고의 쾌는 희열에서처럼 오직 불쾌를 통해서만 발생하는 쾌이고, 이런 연유로 "모순적 감정" 혹은 "부정적 쾌감"이라 불린다. 부정적 쾌감은 이처럼 모순된 감정의 공존을 특징으로 한다.
2) 숭고-현시불가능한 것의 현시/암시
쾌감과 불쾌감의 공존이라는 이 모순된 감정은 이미 언급하였듯이 칸트적 인식론의 문맥에서 말하자면 우리가 '현시할 수 없는 것', 곧 이념적인 것을 현시하려는 시도에서 비롯한다. 칸트에 따르면 우리는 인식 능력으로서 오성과 구상력을 통해서는 한정된 대상에 대한 개념을 가지거나 그 개념과 일치하는 대상을 형상화함으로써 현시할 수는 있으나 이념을, 곧 '현시불가능한 것'을 현시할 수는 없다. 이들 이념 혹은 '현시불가능한 것'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이성'의 능력이다. 가령 우리는 저기 뒤편에 있는 특정 대상으로부터 오는 여러 감각들을 종합하여 문으로 인식한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다시 책상이라는 개념을 통해 책상의 특정한 형상을 현시해 보일 수 있다. 이것은 오성과 구상력의 자유로운 결합에 의해 가능하다. 그러나 우리는 절대적으로 큰 것 혹은 무한히 강력한 힘의 '절대성'이나 '무한성'이라는 이념을 형상화할 수는 없다.
조금전 무수한 별들이 반짝이고 있는 밤하늘의 무한한 공간에 관해 이야기를 한 바 있지만 내 시야에 넘치듯 들어온 그 광경이 그대로 '무한성'이나 '절대성'의 가시적 형상은 아니다. 무한성이나 절대성은 눈에 보이도록 현시할 수 없는 것이다. 요컨대 우리가 그날 밤하늘에서 본 것은 밤하늘의 무수한 별들이었지 그 자체가 절대성도 무한성도 아니다. 칸트에 따르면, 숭고한 것은 자연의 특정한 대상이 될 수 없다. 숭고는 자연의 사물들에서가 아니라 오직 우리의 이념에서만 찾을 수 있다. 나아가 우리는 우리의 마음에 이 이념을 전제하고서만 숭고한 이념들에 이를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이를 파악한 것은 어쨌든 그날 밤하늘의 광경을 매개로 해서 가능해진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 곧 이성이 이러한 광경에 숭고성을 개입시킨다. 우리의 시야의 테두리를 넘어서서 우리는 어떤 절대적인 것에 이르러 그 존재를 (이성을 통해) 포착하였지만 다시 그 절대적인 것을 (구상력을 통해) 현시하려 할 때 우리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고통스럽게도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결론적으로 우리 속에는 (이성으로) 파악하는 것과 (구상력으로) 현시하는 것 사이에는 조화로운 결합이 아니라 분열이 일어난다.
숭고의 감정은 이 분열로부터 일어난다. 이를 리오타르가 구사하는 말로 다시 말한다면, 숭고의 감정이란 한편으로 구상력 자신이 '보여질 수 없는 것' 혹은 '현시할 수 없는 것'을 여전히 보이도록 함으로써, 구상력은 자신의 대상을 이성의 대상과 조화시키려 함이 역으로 구상력의 무력함을 드러내주는 것이라는 사실에서 나오는 쾌이다. 다른 한편으로 숭고의 감정이란 형상의 빈약함이 이념의 광대한 힘에 대한 하나의 소극적 표시 혹은 '부정적 현시'라는 사실에서 오는 쾌이다. 저 밤하늘이 절대적 존재의 형상은 아니라 하더라도 그것의 존재를 알리는 것이기에 더 큰 감동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요컨대 부정적 현시는 곧 "절대적인 것의 현전(presence)의 기호"가 된다.
3) 숭고의 미학과 모던/모더니즘 미술
리오타르는 이 지점에서 모던(modern) 미술을 규정한다. 그는 모던 미술을 "현시될 수 없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표현하는 데에 자신의 '작은 기법'을 할애하는 미술"로 정의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생각할 수는 있으나 볼 수 없는 그리고 보이게 할 수도 없는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이게 하는 것, 바로 여기에 모던 회화의 목표가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숭고는 "모던을 특징짓는 예술적 감성의 형식"이라 할 수 있고 모던 회화의 미학은 '숭고 회화의 미학'이 된다.
리오타르가 자신의 숭고의 미학을 설명하기 위해 예로 드는 대표적인 화가는 미국의 추상표현주의 화가 뉴먼(B. Newman)이다. 그에 따르면 뉴먼의 색면 회화(color-field painting)는 전형적으로 숭고의 미학에 속한다. 한편 뉴먼 자신도 그의 작품론 {숭고한 것은 지금이다}에서 칸트와 버크, 특히 버크의 숭고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버크에 따르면 미술은 '형상적 재현'(figurative represen- tation)이라는 강박에서 벗어날 수 없다. 회화는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눈에 포착된 대상의 이미지를 그려내는 데 한정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따라서 회화는 눈으로 인지할 수 있는 것을 넘어서서는 결코 존립할 수 없다. 다시 말하자면 회화는 '현시할 수 없는 것'을 현시하거나 재현할 수 없다는 말이고 숭고를 위한 어떤 잠재적 가능성도 지니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뉴먼이 보기에 버크의 이러한 저주는 단지 재현을 고집하는 회화, 눈으로 지각할 수 있어야만함을 고수하는 회화에만 먹혀들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떤 회화가 형상과 재현의 감옥을 벗어나 '현시할 수 없는 것'이나 '이념'을 현시할 수 있을까? '보여질 수 없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일까? 결국 모던 회화가 선택한 것은 무언가 형상적이고 가시적인 표현들을 통해서 표현될 수 없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모던 회화는 이 암시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 걸까? 또한 리오타르가 말하는 '현시할 수 없는 것'이란 좀 더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모던 미술이 표현/현시할 수 없음에도 드러내고자 한 것은 대체 무엇일까?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현시/암시하여 가시적이게 한다는 말일까?
이미 칸트의 '숭고'에서 언급하였듯 '현시불가능한 이념'이란 '절대적인 것' 혹은 '무한한 것', 어쩌면 '신적인 것'을 함축하고 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리오타르에 따르면 '현시불가능한 것'은 이것뿐만 아니다. 우주, 인간성, 역사의 목표, 순간(the moment), 선(善), 정의 등이다. 이들은 당연히 눈으로 지각할 수 없어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을 어떻게 보이게 할 수 있다는 말인가? 모던 회화는 이 물음을 자신의 과제로 삼았고, 이를 지배하는 미학은 숭고의 미학이라는 얘기다. 그러니 모던 회화는 아름다움/미에 대한 공동의 보편적 일치를 바탕으로 하는 취미의 미학 내지는 형식의 미학과 결부된 이전의 고전주의 미술 및 아카데미즘과 구분된다. 그러나 다시 말하거니와 현시불가능한 것을 어떻게 현시한다는 말인가?
시기적으로 인상주의이후 20세기 중반의 추상표현주의에 이르기까지, 아니 어쩌면 지금까지도 모던 회화가 벗어나지 못하고 안고 있는 화두가 있다면 '재현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개략적으로 말하자면 인상주의이전 회화에 있어서는 '재현'(repre-sentation)이 그림의 대상과 그려진 이미지 사이의 대응 관계를 통해서 이해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려진 것이 그려진 대상을 얼마나 잘 표상 해주고 있는가가 중요한 문제이다. 그리고 이 문제는 공동체의 합의에 의해 해소될 수 있다고 믿어졌다. 그러나 인상주의, 특히 후기인상주의 이후에 와서는 이런 의미의 재현은 점차 와해되고 만다. 약간 논리적으로 말하자면 '현시불가능한 것'은 형상화/가시화가 불가능하다. 이런 비형상적인 것을 가시적인 형상화를 통해 재현한다는 것은 모순이고, 우리는 이를 '재현의 역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모던 회화는 이런 의미의 재현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고, 이런 모색은 미술가들로 하여금 '회화란 무엇인가?'라는 존재론적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그리고 19세기 말 사진의 점진적인 등장으로 이 질문의 심각성은 더해진다. 다시 말해서 '회화적 이미지'가 '사진적 이미지'에 의해 대체되자 재현의 위기에 대한 반성과 함께 화가의 전통적인 지위는 해체되고 나아가 그의 역할에 대한 근원적인 반성이 대두하게 된다. 이후 모던 회화의 전개는 이러한 반성의 강박으로부터 탈주하는 다양한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4) 다시 숭고의 미학- 뉴먼의 경우
앞서 언급하였듯 숭고 회화의 나타내는 대표적 화가들 가운데 하나가 뉴먼이고, 리오타르는 그의 회화에 대한 논의를 통해 숭고 미학의 얼개를 잡기도 한다.
뉴먼의 작품 <숭고한 영웅(Vir Heroicus Sublimis)>은 세로가 2.5m 넘고, 가로는 5m가 넘는 대형 캔버스에 그려진 그림이다. 그러나 그림은 지극히 간단하다. 캔버스는 온통 전면에 걸쳐 붉은 원색만이 칠해져 있고, 단지 폭 10cm 정도의 줄이 색을 달리하면서 캔버스 양쪽과 중앙쯤에 세로로 네 줄 똑바로 그어져 있다. 그의 <존재(Be) 1>은 앞의 그림보다는 크기는 좀 작으나 역시 대형 캔버스에 온통 붉은 원색이 칠해져 있고 한 중앙에 폭 10cm 정도의 흰줄이 하나 세로로 비교적 반듯하게 그어져 있을 뿐이다. 또 <누가 빨강, 노랑, 그리고 파랑을 두려워하는가?(Who's Afraid of Red, Yellow and Blue?)>는 제목에 나타난 삼 색이 캔버스를 삼분하여 단지 칠해져 있다. 이처럼 그의 그림들은 대다수 이런 식이다. 그런데 이런 그림들 앞에 서면 어떤 느낌이 들까? 그는 왜 이와 같은 그림을 그렸을까?
뉴먼의 그림들을 대하면 즉각 그 심층에 놓여 있는 미학적 지평과 철학적 의도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어떤 울림을 느끼게 된다. 뉴먼의 회화는 '숭고의 미학'과 관계하며 '사건의 존재론'과 밀접하게 이어져 있다. 그리고 이에 이르는 실마리는 우리의 통상의 생각과는 달리 뉴먼의 추상 작업들의 제목을 통해 시작할 때 가장 적절하게 잡힌다. 뉴먼의 초기 조각 작품에는 <여기(here) Ⅰ>, <여기 Ⅱ>, <여기 Ⅲ>이라는 제목이, 그리고 다른 그림들에는 <저기가 아니라 여기(Not there, here>, <지금(Now)>, <순간> 그리고 <존재(Be)>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뿐만 아니라 후기 작품들에는 성서의 내용을 상징하는 제목들이 등장한다. <여호수아(Joshua)>, <아브라함(Abraham)>, <창세기>, <십자가의 성처(聖處)> 등이다. 물론 이들 그림 역시 앞서 묘사한 그의 다른 회화들과 유사한 형상을 나타낸다. 이들 제목의 조각 및 회화와 숭고의 미학은 어떤 관계일까?
한편 흥미로운 것은 이들 작품이 발표되기 전에 뉴먼은 1948년 12월, {숭고한 것은 지금이다(The Sublime is Now)}라는 에세이와 1949년 말 {새로운 미학을 위한 서설(Prologue for a New Aesthetic)}이란 미완성의 소고를 발표한다. 리오타르는 이들 글에서 '숭고', '여기', 그리고 '지금'이라는 세 단어의 얽힘을 발견하고 이와 관련한 물음을 제기함으로써 뉴먼의 작품의 의미에 접근하려 한다. "숭고의 경험 대상이 '여기와 지금'이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그는 이런 의문에서 출발한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의 논의도 당연히 이들 용어에 대한 검토에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리오타르에 따르면 뉴먼은 '여기 그리고 지금', 바로 이 순간 일어나고 있는 것을 그리고자 한다. 즉 바로 이 '시간'을 그리고 지금 즉각적으로 나타난 현전을 나타내고자 한다. 여기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일어나고 발생한 것은 나아가 현시불가능한 것, 곧 이념이다. 또한 뉴먼은 성서에 나타나는 역사적 장면 및 서사와 결부된 시간을 그리고자 하며 이것 역시 당연히 현시불가능하고 따라서 이념적인 것이다. 뉴먼은 이를 어떻게 표현하고자 하는가? 그는 이 순간을 알리는 어떤 대상적 이미지도 사용하지 않으며 또한 역사적 서사의 내용을 알리는 어떤 형상적 상징도 차용하지 않는다. 심지어 역사적 사건의 이념성조차도 추상의 문법으로 환원하고자 한다.
뉴먼은 누구보다도 더 철저하게 재현의 문법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자신의 회화에서 그는 형태를 떠올리는 어떤 형상적 이미지도 허용하지 않는 철저한 추상에로의 환원을, 순전히 회화적 대상 그 자체 만으로의 환원을 시도한다. 다시 말해서 어떤 형상적 이미지의 떠올림도 배제하고 철저하게 색채의 문제, 재료 및 재료와 색채의 관계 문제, 색면의 구성이나 배치의 문제 등으로 환원한다. 이러한 환원을 통해서 뉴먼은 우리에게 그 나름의 숭고 미학의 정점을 알린다. 다시 말해서 순전히 색, 재료, 선, 배열, 구성 등으로 환원하는 형식을 통해 우리에게 놀라움과 경이, 혼란과 충격을 줄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환원은 다시 기존의 추상의 문법을 새롭게 변형시켜 간다는 점에서 전위/아방가르드적이며 우리를 당혹 속으로 밀어 넣는다. 그래서 그가 관여하는 세계는 어떤 형태의 모방도 개입되어 있지 않은 세계, 클레(P. Klee)의 표현을 빌면 '옆세계' 혹은 '사이세계'이다. 또한 뉴먼의 작업은 그후 미니멀리즘(Minimalism)이라 불릴 회화의 새로운 규칙이 출현하리라는 것을 예고한다. 뉴먼의 이와 같은 기존의 문법 흔들기와 새로운 규칙 만들기로 인해 리오타르는 그의 회화가 모던 미술이면서도 전위 미술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리오타르의 분명한 언급은 없지만 다음 절에서 다룰 논의를 선취해 규정해 본다면 뉴먼은 모던과 포스트모던 사이에 있다. 만약 뉴먼이 자신의 색면 회화를 통해, 그 제목들이 암시하듯 결국 신의 현현을 드러내고자 한다거나 아니면 존재 세계의 어떤 본질적 측면을 재현하려는 의도를 갖는다면 그는 아직 모던적인 것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그가 그와 같은 재현의 힘겨운 '의지'를 거부하고 독립적인 추상의 문법을 흔들며 다원성과 차이에 대한 우리의 감수성을 끊임없이 촉발시킬 존재를 발견하고자 도모한 것이라면 그는 포스트모던 하다. 그는 어느 쪽인가? 지금까지 한 얘기로는 포스트모던 쪽에 가깝다. 그러나 이 질문을 가능하게 하는 모던과 포스트모던의 '분리'는 과연 가능한가? 그는 그 사이에 있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3. 모던 미술과 전위, 그리고 리얼리즘의 거부
포스트모던 미술이란 표현 그 자체 속에 현시할 수 없는 것을 드러내주려 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모던적 숭고 미술이다. 또한 그것은 지금까지 받아들여져 왔던 모든 것을 거부하고 새로운 표현들을 찾고자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현시할 수 없는 것의 존재를 충격과 놀라움 속에서 더욱 예리하게 암시하고 우리의 감수성을 새롭게 다듬고자 한다. 리오타르에 따르면 포스트모던 미술의 이러한 점 또한 모던적인 것이다. 그래서 "포스트모던은 분명히 모던의 한 부분"이다. 나아가 (포스트)모던 미술은 기존의 규칙의 지배를 받으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기존의 규칙으로부터 끝임없이 일탈하려 하고 탈출하려 한다. 그러니 그것은 아무런 규칙도 없이 혹은 규칙 바깥에서 작업하면서 자신의 새로운 작업의 규칙을 창안하려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창안된 규칙은 다시 제도나 체제로 확립될 것이고 또다시 다른 (포스트)모던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리오타르는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종말이 아니라 이것의 탄생을 의미하며, 이 탄생은 항구적"이라 말하고, 다른 곳에서는 "모더니티는 원래 그리고 끊임없이 포스트모더니티를 잉태한다"고 쓰고 있다. 또한 그가 (포스트)모던 미술의 이러한 특징을 규정하면서 아방가르드 문제를 끌어오는 것도 이 지점에서다.
이미 말했다시피 예술에서 (포스트)모던 작업은 기존의 규칙의 지배를 받으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기존의 규칙으로부터 끝임 없이 일탈하려 하고 탈출하려 한다. 그러니 그것은 '실험'(experimentation)을 숭상하고 아무런 규칙도 없이 혹은 규칙 바깥에서 작업하면서 자신의 새로운 규칙을 창안하려 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현대 과학 기술의 발전은 이러한 창안의 가능성을 더욱 넓혀 놓았고 그 결과로 비롯된 미술의 새로운 경향은 또한 우리에게 새로운 감수성의 출현을 가능케 하였다. 나아가 그에게 '새로움'이란 언제나 새로운 규칙의 창안으로서의 '새로움'이지 규칙 내에서의, 곧 기성의 체제나 제도의 테두리 내에서의 쇄신이나 고안으로서의 새로움이 아니다. 다소 긴 것 같지만 이러한 주장이 뜻하는 구체적 예를 리오타르는 예술에서의 전위/아방가르드 작업에서 발견한다.
세잔은 어떤 공간을 의심했는가? 인상파의 공간이었다. 피카소와 브라크는 어떤 대상을 공격했는가? 바로 세잔의 대상이었다. 1912년 뒤샹은 어떤 전제를 파괴했는가? 비록 입체파일지라도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전제이다. 그리고 뷔랑(D.Buren)은 뒤샹의 작품에서 다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그가 생각한 또 다른 전제, 즉 작품의 표현 장소를 문제시하고 있다.
1917년 뒤샹이 <제1회 독립예술가 전>에 남성용 변기 한 점을 뒤집어 '샘'이란 제목으로 제출했을 때 당시의 미술계는 큰 충격이었다. 작품은 전시 이튿날 장막으로 가려지고 다양한 논란이 일어나게 되는 원인이 된다. 그것은 미술의 가장 근본적인 전제, 회화이든 조각이든 작품은 작가에 의해 어떤 형태로든 제작되어야 한다는 전제를 파괴하는 것이었다. 그후 뒤샹의 이러한 작업 유형은 미술계의 새로운 작업 규칙으로 확립된다. 그의 작업은 기존의 미술계의 작업 규칙을 일탈하는 것으로서 전위적이었고 이후 그것은 작업의 새로운 규칙으로 받아 들여 진다. 뒤샹은 자신의 작업으로 우리에게 숭고한 감정, 즉 충격과 당혹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에서 그리고 새로운 규칙을 창안하였다는 점에서 모던적이자 포스트모던적이다.
요컨대 기존의 것을 거부하고 새로움에 대한 끊임없는 전위적 추구를 시도한다는 점에서 모던 미술과 포스트모던 미술은 서로 목표를 어느 정도 교차시키고 있다 하겠다. 그렇다면 리오타르에 있어 미술과 관련하여 모던과 포스트모던은 어떻게 구분되는가? 그런데 우리는 바로 이 구분으로 나아가기에 앞서 리오타르의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은 우선 리얼리즘에 대한 거부에서 비롯되었음을 알아야 한다.
리오타르가 보기에 리얼리즘의 작가들이 (포스트)모더니즘 작가들과 변별되는 결정적인 점은 전자가 '예술적 실험', 즉 전위/아방가르드를 거부한다는 데 있다. 그들은 "질서의 소환 및 단일성·동일성·안정성·대중성… 공공성"을 갈망하며, "예술가와 작가들은 공동체의 품안으로 돌아가야 하며, 혹은 적어도 공동체가 병들어 있다고 생각되면 그것을 치유하는 역할을 해야 함"을 작업의 사명으로 삼는다. 따라서 리얼리즘의 작가들은 치유를 갈망하는 대중을 위해 현실을 그려야 한다고 생각하며, 이 점에서 화가와 대중들 사이의 '소통'과 미의 '합의'는 당연히 요구되고 '재현'에의 관심은 피할 수 없다. 그러니 기존의 소통 공동체의 규칙을 일탈하고 전복하려는 전위/아방가르드적 실험이란 그들에게서는 청산해야 할 유산에 지나지 않는다.
요컨대 리얼리즘은 (1)예술의 서사와 미에 대한 소통과 합의를 전제하는 취미의 미학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2)예술적 실험을 회피하거나, 혹은 시도한다 하더라도 종국에는 기존의 예술의 규칙을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과 구별된다. 한편 나는 리얼리즘의 예술적 사명 속에 이념적인 것, 가령 '해방'이 포함되고 있고, 또한 이를 비록 재현을 통해 표현되고 있다면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은 서로 겹쳐지는 지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재현적 묘사를 통해서도 현시불가능한 것의 표현은 가능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 점에 관해서는 나중에 다시 언급하기로 하고 아무튼 리오타르는 리얼리즘의 이러한 사명을 못마땅해 하며 이의 극복을 위해 포스트모던 미학을 제시한다.

4. 미술, 모던과 포스트모던
그렇다면 모던/모더니즘 미술과 포스트모던/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은 어떻게 구분되는가? 리오타르에 따르면, 모던 미학은 숭고의 미학이지만 여전히 향수적이라는 점에서 포스트모던 미학과 갈라진다.
모던 미술은 현시할 수 없는 것을 현시하려 하고 이를 위해 끊임없이 실험을 통해 자신의 표현 기법을 다듬어 간다는 점에서 숭고와 아방가르드를 지향하지만 재현에의 향수를 완전히 포기하지 않음으로써 진정한 숭고의 감정을 형성하는데 실패한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현시 능력의 부적절성과 무기력함을 인정하지 못하고 마치 현시불가능하고 이념적인 것을 눈앞에 현전시킬 수라도 있는 것처럼 인간 주체의 부질없는 의지를 강조한다. 그러나 결국 향수에 대한 이러한 미련은 우리로 하여금 특수한 회로의 질서와 형식을 표상하게 하고, 이것은 다시 일관된 어떤 인지를 낳게 하여 결국 위안과 기쁨을 제공하고 취미의 합의를 도모케 한다.
모던적 향수는 인간 주체, 곧 화가/작가에 대한 알길 없는 신뢰를 여전히 내포하고 있어 개별적인 작품을 통해 현시할 수 없는 것, 즉 이념들에 대한 현시의 가능성을 인간 주체의 가능한 능력인 양 믿는다. 그래서 모던 미술은 "전체와 일자에 대한 향수, 개념과 감성의 조화에 대한 향수, 투명하고 의사소통적인 경험에 대한 향수"로부터 진정 자유롭지 못하다. 말하자면 모던 미술에는 현시할 수 없는 것, 곧 이념을 단지 '결여되어 있는 내용'으로 간주하여 현시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으며, 비록 연속적인 조형적 실험을 통해 새로움의 끊임없는 추구를 시도하지만 그 목표는 여전히 이들 이념에 대한 화가/작가들의 표현에의 주체적 의지가 여전히 깔려 있다는 얘기다.
반면 포스트모던 미술은 모던 미술과 마찬가지로 현시할 수 없는 것, 곧 이념을 표현하고자 하지만 모던적 주체의 역할을 거부하고 차라리 인식 능력의 '탈인간성'(Inhumanity)을 강조한다. 그래서 취미의 합의, 소통적 질서의 회복, 개념과 감성의 억지 조화로 인한 어정쩡한 위안에 별 관심이 없다. 그것은 새로운 규칙들의 전위적 창안에서 비롯하는 존재의 증가, 다시 말해서 다양한 표현들의 다원성을 우선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 증가는 이념의 현시 능력이 없음을 망각한 모던적 주체의 부질없는 의지에 의해 가능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모던적 주체는 언제나 진정한 숭고의 도래에 실패한다. 그래서 우리의 감수성을 새롭게 환기할 수 있는 다양한 조형적 실험들에 의한 작품들의 (의도된 생산이 아니라) 발생이 멈춤 없이 일어나기를 바란다. 물론 이 발생의 회로는 모던적 의식과 주체를 당연히 선행한다. 그것은 인간 주체의 바깥에서 시작하여 우리에게 마치 사건처럼 일어난다. 나아가 사건으로서의 작품은 그러나 단순히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현시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한다는, 그래서 세계는 시간 속에서 영원히 변화하므로 총체성의 이름으로 걸러지지 않는다는 것을 더욱 예민하게 느끼기 위해서이다.
요컨대 좀 투박하지만 모던과 포스트모던 간의 구분에 대한 리오타르의 논점을 캘리니코스는 다음과 같이 적절히 지적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 내의 한 경향으로서, 현실을 질서 있고 통합된 총체성으로서 경험할 수 없는 우리의 무능력을 한탄하려 들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기꺼이 찬양하려는 태도로 특징 지울 수 있다.

5. 약간의 비판
여기서는 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던 미술론에 대해 전반적인 비판을 하지는 않는다. 먼저 나는 그의 포스트모던 미술론의 어떤 입장은 옹호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래서 그에 가해진 몇몇 논평들에는 방어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는 불만을 피력하는 정도로 비판하겠다. 그러니 그 불만의 충분한 이유는 뒤로 미루어 질 수밖에 없다.
먼저 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던 미술론을 간략히 정리해 보자. (1)모던 미술과 함께 포스트모던 미술은 현시할 수 없는 것을 현시/암시하고자 함으로써 숭고의 미학을 공유한다. (2)포스트모던 미술은 모던 미술에서 역사적으로 보여지는 기법상의 전위/아방가르드 실험을 철학적으로 전치시켜 자신의 방법상의 원리로 삼는다. (3)현시할 수 없는 거대 이념들의 표현은 모던 미술 내지는 모던 작가들의 주체적 의지가 포기하지 못하고 연연해하는 과제인 반면에, 포스트모던 미술은 그러한 모던적 과제를 거부한다. 그것은 오히려 세계의 불확실성과 차이의 존재론을 드러내는 데 기여하고자 한다. (4)포스트모던 예술/미술가는 모든 전언들을 전유할 수 있는 배타적 권리를 가진 모던의 전능한 존재가 아니다. 그의 과제는 존재 세계로부터 전해져 오는 미지의 메시지들을 수집하고 획득하며 복귀시키는데 자신의 온 신경 조직을 가동시키는 탈인간중심주의적 존재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리오타르의 미술론에서는 애초부터 '소통가능성'이 우선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작품 생산의 전제가 되지 않는다. 사건으로서의 작품이 발생하고 세계에는 현시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하며, 우리는 이를 현시할 수 없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숭고의 감정을 새롭게 불러일으키는 것이 먼저이고, 소통은 이차적인 문제가 된다. 오히려 기존의 소통 체계를 일탈하는 비소통, 불일치가 작업의 미덕이 된다. 따라서 미술/예술을 세계 변혁의 한 수단으로 혹은 화가/예술가를 세계 변혁의 한 주체로서 사회적 삶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 그래서 대중적 합의나 일치를 가능하게 하는 도상을 확립하려는 리얼리즘의 사명은 리오타르가 보기에는 월권이거나 왜곡된 결과만을 낳을 뿐이다. 요컨대 리오타르에게서는 예술 작품이 먼저 하나의 사건으로서 출현하여 세계의 시간성을 알리는 것이 우선적이다. 그리고 대중의 소통성 혹은 합의의 공동체는 부수적이거나 이데올로기의 음모일 뿐이다.
그러나 미술에서 구체적 형상이 재현적 형태로 그려진다고 해서 그것이 그대로 기존의 소통과 합의의 체계로 환원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를 통해 기존의 틀이나 준거 체계가 새롭게 되물어지고 전복되는 경우도 가능하고, 그래서 숭고로 이어질 수 있다. 여기서 상론할 수 없지만 가령 바젤리츠(G. Baselitz), 키퍼(A.Kiefer), 그리고 리히터(G. Richter) 등의 '새로운 이미지'(the New Image) 운동에서 그 한 가능성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드 발(de Vall)은 리오타르가 새로운 규칙의 창안이 숭고한 감정을 우리에게 환기시킬 것이라고 하지만 숭고한 것과 단순한 새로움 간의 구분에 대해서는 실제 침묵하고 있다고 논평한다. 달리 말해서 새로운 것의 출현이 그대로 숭고의 환기로 이어지는 지를 묻는다고 하겠다. 그리고 이것은 칸트의 숭고에 대한 리오타르의 연구가 상당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해는 칸트와 차이가 난다는 것을 시사한다.
크라우더(P. Crowther)는 리오타르가 칸트의 숭고 개념에 내포되어 있는 '초감성적인 것'에 대해 상세한 언급을 회피한다고 비판한다. 말하자면 숭고의 무거움, 곧 위대한 이념에 주목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숭고에서 우리가 쾌를 갖게 되는 것은, 무수한 별들이 빛나고 있는 저 밤하늘에서 우리가 우주의 영원한 침묵을 불안 속에서 느끼지만 순간 저 대상적인 것을 초월하여 절대적인 것 혹은 신적인 것의 존재를 우리의 정신(이성)이 감지함으로써 이다. 그런데 리오타르는 칸트의 숭고 개념을 자신에게로 전유하지만 정신(이성)의 대상 초월성에 별반 주목하지 않은 것 같다. 나아가 또 다른 글에도 크라우더는 비슷한 지적을 한다. 거대하고 파괴적인 어떤 현상에 대한 감각적 인식의 부적합성이 결국 이성적 파악의 힘을 작동시키며, 이 힘은 숭고의 경험에서 충격으로 드러난다. 우리는 이 힘을 통해 가시적인 것의 한계를 초월한다는 것을 느끼고 향유하게 되며 나아가 진정한 숭고라는 심오한 만족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리오타르는 정신(이성)의 이와 같은 적극적인 힘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리오타르에게 사실 중요한 것은 앞서 말했다시피 현시할 수 없는 이념들을 어떻게든 현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현시할 수 없는 것들의 '현시할 수 없음'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드러냄의 방법론이 '아방가르드/전위'이다. 그것도 전위적인 조형적 실험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실험을 통한 이념들의 현시불가능성을 드러냄으로써 리오타르는 무엇을 하고 하는가?
그것은 간단히 "시간에 대한 정신의 월권을 해결하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시간은 본질과 실체 중심의 서구 형이상학이 오래 동안 망각하였던 존재론적 영역이다. 여기에는 다양한 단위들이 속한다. 형상, 이미지, 뉘앙스, 음조(音調) 등 여기 그리고 지금 물질의 표면에서 멈춤 없이 일어나 세계의 표면을 이루고 있는 다양한 과정들과 관계들, 및 사건들이다. 이것들은 우리들 주변에서 끊임없이 발생한다. 우리는 따라서 어떤 순간 어떤 곳에서도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는 것이라곤 발견할 수 없다. 리오타르에게서는 바로 이것이 경이이고 숭고한 것이다. 세계의 시간성 내지는 사건성, 이것이 세계의 진정한 모습이다. 따라서 그는 정신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개념화, 일반화, 획일화, 전체화의 전횡을 거부하고 극복하려는 것이다.
요컨대 리오타르의 미술론은 전위적인 조형적 실험의 무한성을 통해 존재 세계의 시간성(우연성, 복잡성, 비규정성)을 드러냄으로써 우리에게 숭고의 감정을 느끼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리오타르의 이러한 지향적 태도 자체가 어떤 정신성, 어쩌면 그가 그토록 거부하려 한 일종의 메타서사 아닐까? 미술의 현장 내에서 말하자면 비록 전위적인 조형적 실험 끝에 일어나게 되었다 하더라도 모든 존재의 증가가 그대로 진정한 숭고의 감정으로 이어지고, 따라서 '희열의 증가'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진중권은 리오타르의 '사건으로서의 작품=숭고'를 그대로 인정하면서도 숭고가 얼마든지 가벼워질 수 있음을 지적한다. 그가 인용하는 나폴레옹의 "숭고에서 우스운 것까지는 한 걸음"이라는 말도 아마 이런 존재의 단순 증가가 숭고는 커녕 언제든지 쓰레기로 될 가능성을 지적하는 말이겠다. 그렇다면 어떻게 잡동사니를 피해갈 수 있는가? 리오타르가 이 점을 영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아니 암암리에 어떤 실천적 지침을 전제하고 있다.

6. 끝맺는 말 : 숭고의 미학, 그 가벼움과 무거움 사이에서
긴 말 할 수는 없지만 나는 앞의 비판들은 리오타르가 존재(사건)의 증가와 우리의 정신적 힘과의 관계를 분리한다는 점에서 비롯된 적절한 지적임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한때 모던적 운동이 지녔던 과도한 임무가 월권이고 위장된 테러임을 지적하면서 '사건으로서의 작품의 우선성'으로 이를 대체하려는 그의 시도가 그대로 무용한 것은 절대 아니다.
최근 전자 통신 기술의 그야말로 급격한 발전으로 인해 가능해진 다양한 표현 매체들의 출현은 리오타르가 80년대 초 예견하고 있었던 것보다 더욱 존재의 증가를 촉발시켜 가고 있다. 이제 어떤 공간에서 어떤 방식으로 기법과 장르와 매체들이 상호 복합적으로 접합하여 새로운 규칙들의 창안을 기도할 지 누구도 쉽게 예상하지 못한다. 추상과 구상 그리고 오브제 등이 여러 전자 매체를 통해 상호 접합하여 다양하게 드러내는 이미지들의 범람이 우리에게 어떤 감수성의 촉발을 가져올 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다시 한번 말하거니와 이렇게 결과한 모든 것들이 그대로 진정한 숭고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나는 다양한 조형적 실험을 통한 존재(사건)의 증가와 정신성의 힘의 상호 연관을 다시 제안하고자 한다. 아니 사건과 정신의 결합은 애초 칸트에게서, 원래 동양의 미술론에서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리오타르에게서도 이러한 관계 맺음의 한 측면을 읽을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가 보기에 자본주의 역시 그 본성상 자본 증식의 논리에 따라 끊임없는 자기 혁신을 통해 스스로를 유지해 가는, 그 구조의 전체를 알 수는 없지만, 무한한 에너지 체계이다. 그래서 아방가르드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규칙의 끊임없는 창안을 미덕으로 삼고 있다. 그래서 "자본주의의 미학은 미의 미학이 아니라 숭고의 미학"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자본주의가 오늘날의 과학 기술의 발달과 기묘한 밀월 관계를 유지하며 혁신에의 추구를 무한히 추구하면서도 그 도달하려는 끝은 곧 '효율성 증대'와 '돈'이다. 돈이 된다면 어떤 유형의 조형적 실험도 허용되며 그로 인한 충격주기는 바람직한 태도가 된다. 여기서 상론할 수는 없지만 리오타르는 이 지점에서 자본주의에 대해 이중적 태도를 취한다. 즉 그는 부분적으로 자본주의 미학의 혁신성에 기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오로지 돈과 효율성 제고만을 목표하는 기술 혁신이나 쇄신에 대해서는 반대한다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로 하여금 총체성에로 휩쓸려 들어가게 하는 것이 이것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혁신은, 그것이 미술/예술적이든 정치적이든 혹은 그 밖의 다른 장르에서든 '상업주의'와 '협소한 합리성'에 대한 저항이라는 이념에 정향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요컨대 리오타르는 전자 기술과학의 발달과 맞물려 더욱 극단적으로 가능해진 조형적 실험의 무한성을 허용하되, 명시적이지는 않지만 그것이 탈상업주의의 방향으로 나아가길 지향한다 하겠다. 정리하자면, 나는 오늘날 전위적인 조형적 실험의 가능성이 무한하다는 리오타르의 판단은 옳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이 촉발시킬 새로운 감수성의 출현을 놀라움(숭고) 속에서 느끼게 되고 우리는 언제나 다른 모습의 세계를 보게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봄과 느낌은 리오타르는 간과하고 있지만 우리에게 부수적으로 혹은 수동적으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정신의 초월성과 비판적 개입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단순한 존재의 증가가 그대로 진정한 숭고로 이어질 수 없다. 작품이 사건으로서 발생할 때 그것이 드러내는 숭고성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기 위해서는 정신의 고양 내지는 깨달음은 필수적이다. 어떻게 이러한 정신의 관여 없이 사건의 일어남이 어떤 '의미'로서 존재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렇다고 존재의 드러남과 정신의 개입이 오로지 고차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지평에서만 이루어지는 것도 또한 아니다. 어쩌면 이러한 지평에서 드러나는 숭고는 오히려 초연해 도리어 우스꽝스러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존재와 정신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새로운 만남은 현실의 리얼한 지평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뿐만 아니다. 나아가 이 일상의 현장에서 우리가 잊고 있거나 잃어버렸던 정신의 가치들을 다시 회복시키는 것도 숭고의 가벼움과 무거움 사이에서 긴장을 유지시키는 한 방식일 것이다. 그리고 이 가치들이란 동아시아적 정신성, 곧 자연과 존재에 대한 도가(道家)와 불가(佛家)의 가르침이다. 이에 관해서는 다음에 상론하겠으나 부분적으로 다른 곳에서 이미 다루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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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Lyotard's Postmodern Theory of Art
- an Aesthetic of the Sublime, the Ontology of event,
and a criticism -
Bae, Chul-Young (Dongeui Univ.)

In this paper, I try to outline the French Philosopher, J.-F. Lyotard's theory of postmodern art critically, to evoke a contemporary situation of art, and moreover to find a new orientation of today's art. His theory, though it is somewhat vague and very diffcult to be summarized simply, can be formalized as the continuity and dis- continuity of modern theory of art.
Explaining the process of formalization, I want to realize my trial. Therefore the paper is constructed by following contents; a concept of the sublime, an aesthetic of the sublime as the modern, avant-garde as an important technique of modern art, the postmodern art, and the difference between the modern and the postmodern.
I, on the whole, sympathize with Lyotard. I truthfully support his efforts to defend the mulyiple and the new positively and to seek the overcome of humanistic aesthetics. As it were, he emphasizes the increase of art-works as events, the inhumanistic aesthetics, and the superiority of eventness over spirituality.
But I have a dissatisfaction against his claims. I think he neglects a research of different meanings and ideas of the spiritual.

by 育士道(육사도) | 2005/05/18 17:21 | 世具視言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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